Der Weihnachtskarpfen | 비키 바움 | 박광자 옮김
흄세 레터
"황홀하게 끓어넘치다 어느새 비감이 찾아드는 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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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img src="/icons/aquarius_red.svg" alt="/icons/aquarius_red.svg" width="40px" /> “못 이룬 꿈, 어머니, 못 이룬 꿈뿐이에요.” 그녀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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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러운 기쁨, 굶주림과 기다림, 극심한 치통…… 먹고사는 슬픔을 희망으로 소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 독일어권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린 비키 바움의 소설집. 국내 초역.
“왜 죽이지?”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히는 〈크리스마스 잉어〉부터 먹고사는 행위 자체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길〉, 〈굶주림〉, 〈백화점의 야페〉까지. 각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기름때처럼 잘 닦이지 않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바움은 삶의 압박감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지리멸렬해진 마음이라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그린다. 그들을 꼭꼭 씹으며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삶의 고통이 배어 있는 식탁에 앉아 억지로라도 희망을 삼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바움은 사후에 출간된 회고록 《모두 전혀 다르다》에서 농담하듯 자신을 ‘이류의 일류 작가’라고 부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여성이라는 점과 삶에 밀접하게 닿은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순수문학의 반대편에서 대중작가로 폄훼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대의 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해석 틀과 여성 문학에 대한 관점이 여럿 생겼으며, 1920∼19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받은 압박감을 가장 잘 묘사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바움은 상업주의와 매스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현대 작가의 등장을 예고하기도 했다. 당시 순수문학의 얼굴이었던 토마스 만이 바움의 〈길〉을 상찬했다는 점도 당대 바움이 받았던 불합리한 평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며, 〈길〉에서 날카롭게 보여준 여성의 현실이나 권리는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의 단편들을 연상케 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특별히 대단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잉어〉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먹을 잉어 요리를, 〈굶주림〉의 주인공은 사랑받기를, 〈길〉의 ‘친칸 부인’은 새로운 옷장을, 〈백화점의 야페〉의 소년은 넥타이를 원했을 뿐이다. 언뜻 소박해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소망은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그마저도 찢어진 희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소망 사이를 위태롭게 저울질한다.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식탁
“말리 고모가 도착해서 대형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의 권한을 이양받아야 비로소 빈에서 크리스마스 준비 업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졌고, 모든 것이 변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잉어를 고르곤 했던 시장은 이제 황량해졌고, 잉어는 구경할 수도 없다. 〈크리스마스 잉어〉의 ‘말리 고모’는 적어도 겉으로는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렵게 구한 잉어를 욕조에서 삼 주간 키우기로 하는 등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파티 준비에 열중한다. 그사이 가족들은 잉어에게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잉어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며 전쟁 전, 평화롭던 삶의 상징이 되는데…….
잉어를 잡아야 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작고 연약한 잉어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이 죽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리 고모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며 “왜 죽이지?”라고 소리치는 대상은 작은 욕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는 잉어처럼 보이지만,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들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굶주림〉의 ‘가브릴로프스키’는 전쟁으로 잃은 약혼자에게 받은 스컹크, 새롭게 세 든 집주인의 아들을 거쳐 젊은 의사에게 사랑을 쏟는다. 하지만 젊은 의사는 가브릴로프스키의 신경증 증세를 건드렸을 때 드러나는 징후를 관찰해보려는 가해자에 불과하다. 어느덧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굶어야 할 정도로 궁핍해진 가브릴로프스키는 피아노 교습을 하는 등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점점 위축되고 망상도 심해져 젊은 의사가 무심한 태도로 스컹크를 죽일 때도 분노하지 않으며,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인다.
발작을 일으킨 가브릴로프스키가 집주인 아들 ‘빌리’에게 달려드는 장면은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삶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피아노 교습에서 해고되고 집에 돌아와 “빌리는 내 아이지?”라고 묻지만, 빌리는 “소심하게, 방어하듯, 부끄러워”하며 말없이 먹어댄다. 이때 가브릴로프스키는 삶과 사랑에서 다시 한번 거절당한다. “이상하게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이제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터질 것 같은 심한 압박감 속에서 “또렷하고 끔찍하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음식이 가득한 빌리의 둥근 뺨과 행복하게 씹고 삼키는 아이의 관자놀이 근육”이었다. 삶에서 극히 드물게 포만감을 느꼈던 가브릴로프스키는 “내부에서 무언가 부서져서 밖으로” 토하듯 쏟아낸다. 형태가 있던 음식이 식도와 위를 거쳐 형태 없는 액체가 되듯. 끈질기게 삶의 형태를 만들려고 했던 가브릴로프스키가 게워내는 건 형태 없이 쏟아지는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