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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것이 바로 세상이야!┃김기태

오래전 서울에 처음 온 날, 나는 전철역에서 두리번거렸다. 노선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청소년용 승차권을 구매했다. 목적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2호선이었다. 어두운 터널을 한참 달리다 한강 근처의 고가 구간으로 진입하며 돌연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 이렇게나 넓은 곳에, 이렇게나 많은 건물을 짓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강원도의 한 분지에서 자란 내게 그 창밖 풍경은 대도시에 관한 최초의 스펙터클로 남았다.

곧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종종 이 도시는 모든 장르가 준비된 멀티플렉스 극장 같았다. 누구를 만나 어떤 분위기로 무엇을 할지에 따라 장소를 정했다. 광화문과 강남과 홍대, 아니면 영등포와 이촌과 성수, 미술관에서 유명 전시를 보고 근본 있는 노포에서 양푼에 찌개를 끓여 먹고 실내 분수가 설치된 라운지에서 열대 과일 맛 칵테일을 마시고…… 게다가 이 관대한 멀티플렉스에는 일종의 예술영화 전용관도 있었다. 아무리 비주류적인 취향을 위해서도 골목 하나 정도는 할당된 것이다. 필요한 건 지불 능력일 뿐이었다.

흘러가던 밤 중 하나, 나는 종각 뒤편의 청계천변을 걷고 있었다. 좌측으로는 손꼽히는 대기업들의 사옥이, 우측으로는 네온사인에 젖은 레스토랑과 술집들이 즐비했다. 늦봄의 선선한 날씨, 테라스가 딸린 펍은 폴딩 도어를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수초 향기가 섞인 바람을 만끽하며 젊은이들이 맥주를 마셨다. 한쪽 벽에 붙은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프로 야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맞은편 인도 경계석에는 검고 마른 노인이 걸터앉아 있었다. 폐지며 고물이 실린 수레를 세워두고, 노인은 펍에서 틀어둔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증권사의 유리 마천루 아래, 콘크리트 하천과 크래프트 비어와 프로 야구, 그리고 수레 끄는 노인. 도시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존재가 은막의 뒤편에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물론 도시는 금세 형형색색의 꿈과 온갖 멜로디들을 쏟아내고, 그 밤의 천변 풍경도 내게는 도시적 스펙터클의 하나로 남았을 뿐이다. 다만 가끔 나는 정신 나간 관객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흔들며, 그만, 그만, 불 좀 켜보라고 소리치고 싶다. 오늘의 서울은 너무 크고 빠르고 즐거워서 아무래도 나 같은 건 묻혀버릴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무스잉은 1930년대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상하이에서 목소리를 남겼다. 만 28세에 사망하기까지, 이 젊은 작가는 ‘만화 속 지구처럼 가볍고 광적’으로 회전하지만, ‘구심력이 없으며 모든 것이 허공에 건설’되는 도시를 바로 그 도시의 리듬으로 기록했다. 〈상하이 폭스트롯〉이나 〈나이트클럽의 다섯 사람〉 같은 수록작이 대표적이겠지만, 그렇다고 무스잉을 댄스홀을 전전한 모던 보이로, 향락과 허무에 절여진 유한계급의 밤에 천착한 소설가로만 읽을 순 없다. 그는 〈공동묘지〉에서는 첫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소년을, 〈팔이 잘린 사람〉에서는 산업재해로 파멸에 이르는 노동자를 그리기도 한다. 내게 무스잉은 출근하는 아침부터 춤을 추는 밤까지, 내밀한 애욕부터 비정한 산업화의 파도까지, 상하이라는 대도시의 폭과 깊이를 ‘해부용 칼 같은 눈과 쫑긋 세운 귀’로 탐구한 작가로 읽혔다. 말하자면 무스잉은 상하이의 댄스홀을 그린 게 아니라 상하이라는 댄스홀을 그렸다. 음악에 따라 춤을 추듯, 고저와 장단과 강약을 갖춘 장면들을 따라가다보면 마침내 이런 문장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야! 봐봐, 터져버린 풍선…… 터져버린 풍선아!”

무려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 패기 있는 문장에서 일종의 비극적 쾌감을 느낀 것은, 무스잉의 상하이와 내가 사는 오늘의 서울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932년 4월 6일 상하이의 토요일 밤, 나이트클럽에서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총을 쏘고 누군가는 아이를 잃는다. 서울의 오늘 밤, 누군가는 도루를 하고 누군가는 맥주를 마시고 누군가는 수레를 끈다. 좀처럼 몸을 흔들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벗어날 수도 없는 이 이상한 악곡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막막할 때, 나는 누군가가 선언해주길 은밀히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터져버린 풍선이라고, 이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

📚 무스잉, 《상하이 폭스트롯》, 강영희 옮김
🛶 “상하이,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 김기태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있다. 젊은작가상, 신동엽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클러리사와 산책하기┃임선우

산책 준비하기 클러리사와 산책하기 위해서는 신발 끈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 클러리사는 요정처럼 춤추듯이 걷고, 겁이 없고, 호기심이 많으니까. 길을 걷다가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면 어디로든 갈 것이다. 그 애가 진창에라도 빠진다면(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한 치 망설임 없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클러리사와 산책하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들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따분한 사람이고 흥미로운 경험도 부족하지만…… 상상으로 그 애 마음을 들뜨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서둘러 작지만 활기찬 마을, 북적거리는 시장, 커다란 분수대, 빨간 자동차와 기사 젱킨스, 따뜻하게 끓인 수프 한 그릇과 공중에 날아오르는 하얀 나비 한 마리를 상상으로 준비한다.

클러리사와 산책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눈이 한 개 더 달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 눈을 크게 뜨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클러리사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애를 지켜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사이에 파란색 비단실로 만들어진 비밀스러운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지켜봐야만 한다. 끈이 끊어진다면 클러리사는 죽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클러리사는 죽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준비하고 현관 앞에 선 순간 나는 깨닫는다. 문밖에 나서는 순간 클러리사를 잃을까봐 무척 두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