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셴바흐 씨, 가방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그 가방을 가져가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멀리 베네치아까지 가져갈 수 없을뿐더러 그 가방에 든 것들 중 절반은 쓰지 않을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가방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멀게 느껴진다면 그 가방이 뭐가 대수겠어요. 가방을 내려놓았다면 이번엔 자신을 내려놓으세요. 우리가 버거워하는 무게는 내일이라도 당장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꿈 따위로 무거운 거예요.
당신은 외롭습니다, 소설 속의 이런 문장을 통해 당신 외로움의 상태를 읽었습니다. “외로움이 독창적인 것, 과감하면서도 낯선 아름다운 것, 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외로움은 불합리한 것, 균형 잡히지 않은 것, 용인되지 않는 부조리한 것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몰아가기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평화와 고요에 관여한다면 그대로 두면 됩니다. 그러니 외로움을 잘 배양해야 하는 수밖에요.
우리는, 눈에도 마음에도 지퍼가 달려 있다는 생각이에요. 아무 관심이 안 생기는 사람한테는 굳게 잠겨 있다가도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동시에 눈과 마음의 지퍼는 열리게 돼 있거든요. 그래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으니 참 좋아요. 열리기만 하고 닫을 수 없다거나 닫기만 하고 열 수 없다면 그건 정말, 그 자체로 감옥일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다에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래요. 아셴바흐 씨는 베네치아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상태였습니까.
남자는 자신을 돌봐주는 어머니 같은 품의 존재가 아닌, 자기가 보살펴주고 행복하게 해줄 존재에게서 사랑을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저 인간은 인간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영역의 이야기일 겁니다.
세계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 이상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돼요. ‘어떻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끊어져 있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도 하게 돼요. ‘이거 지도 만드는 사람이, 귀찮아서 이렇게 한 거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나라와 나라가 나뉠 때 지도 위에다, 자를 올려놓고 선을 그어서, 국경을 정한 경우가 많이 있어서 그런 거래요. 아셴바흐 씨, 우리도 가끔은 우리 감정 위에 자를 올려놓고 정확히 감정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먹은 이 마음이 진짜를 향해 있는지 아니면 기분 때문인지 잘 모를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느 한 사람한테 계속해서 이 감정을 유지해도 되는 건지 어떤지 판단이 안 설 때도 있어요. 베네치아의 리도 해변에서, 당신을 따라다녔던 선, 하나가 있었다고 가정해봐요. 우린 항상 경계에 살고 있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경계. 좋아하는 사람과 안 좋아하는 사람의 경계. 좋은 예감과 안 좋은 예감의 경계. 당신은 그 선, 바깥으로 걸었을까요, 아니면 그 선, 안쪽으로 걸었을까요?
아셴바흐 씨는 소년의 안쪽을 걸었을까요, 바깥쪽을 걸었을까요. 당신의 시선이 닿던, 소년에게서 벗겨낸 덧없음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털어내지 않는 아셴바흐 씨.
입상과 거울! 아셴바흐의 눈은 거기 푸른 바다 가장자리에 서 있는 고귀한 형체를 감싸 안았다. 그는 열광적인 환희에 사로잡혀 아름다움 자체, 신의 생각이 표출된 형태,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유일하고 순수한 완벽함을 그 눈빛만으로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 완벽함의 인간적인 모상과 비유가 숭배받기 위해 여기 경쾌하고 사랑스럽게 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도취였다. 노년에 접어든 예술가는 서슴없이, 그야말로 탐욕스럽게 그 도취를 반가이 맞이했다. 그의 정신은 산고를 겪었고, 그의 교양은 격앙되었으며, 그의 기억은 젊은 시절에 받아들였지만 한 번도 스스로 불길을 살린 적이 없는 태고의 생각들을 일깨웠다.(83쪽)
네, 당신이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보고 이렇게 출렁였던 것처럼 나는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나는 살면서 ‘베네치아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베네치아에서 죽어야 해요. 그래야 거기서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라는 말은 이어서 한 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