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피조물을 통해 영생을 꿈꾸는가. SF의 출발점이라고 불리는 《프랑켄슈타인》은 읽을 때마다 오싹한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처음 창작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 소설은 경이로운 과학적 발견의 시대를 당연한 듯 살아가는 우리를 되비추는 거울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때문에 빛바랜 흑백 이미지로 남았던 기억과 달리,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21세기 생명공학의 꿈을 다루기 위해 과거를 무대로 삼은 우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이라는 상상의 강력함은 그 힘을 잃는 법이 없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언제나 “프랑켄슈타인이 소설 속 피조물이 아니라 그 창조자인 과학자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라고 운을 뗀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괴물로 예정되지 않았고, 그저 꿈의 산물이었습니다. 인간이여, 그대의 기도가 이루어질 일을 근심할지어다. 그리스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조각과 사랑에 빠졌다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었다면, 《프랑켄슈타인》의 프랑켄슈타인은 맹렬한 목표 의식으로 “생명이 없는 육신에 생을 불어넣”는 일에 성공했고, 그 즉시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인간을 만들고자 했는데, 살아 있는 시체를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여기까지만 말하고도 연관 지을 레퍼런스가 많고도 많지요. 하나만 예로 들어볼까요. 《프랑켄슈타인》의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제목이 ‘프로메테우스’였다는 점을 떠 올려보세요. 그 영화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피조물은 인간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자신과 꼭 닮게 만든 로봇 데이비드일까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려는 욕망은 신을 창조하려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인간이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 출산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을 존재의 본성과 교육을 다룬 이야기로 읽는다면 어떨까. 세상에 나온 존재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다. 몸은 성인과 같으나 그의 사회적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 《프랑켄슈타인》의 중반부, 고립된 존재가 시체를 만들어내며 우리 앞에 당도한다. 불안은 중첩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과 재회하는데, 피조물의 말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설득적이다. 길게 이어지는 그의 흥미진진한 언설에 따르면 그의 여정은 찰나의 희망과 고통 어린 이별로 마무리되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당신네 인간들이 가장 우러르는 것은 부를 겸비한 고결하고 순수한 혈통이더군. 둘 중 하나만 가져도 존경받을 수 있어. 하지만 둘 다 갖지 못하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랑자나 노예 취급을 당하며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재능을 바치는 운명에 처했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누가 나를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 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돈이나 친구뿐 아니라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 그는 요구한다. “나와 같은 부류, 나와 같은 결함을 가진 동반자가 필요해. 그런 존재를 만들어줘.” 누군가와 함께하는 안온함을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이제 파국만이 남았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뀐다. 인간 복제를 떠올리며 읽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에 더해 AI와 딥페이크 기술을 연상하며 읽는다. 이 시대의 프랑켄슈타인들은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 보기에 아름답고 흠 없는,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와 얼굴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끝에 인간소외와 그 자신이 괴물로 전락한 줄도 모르는 프랑켄슈타인들의 자만심만이 남지는 않을까. 게다가 《프랑켄슈타인》은 반복해 읽을수록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토로하는 고통에 눈이 간다.
창조에 따른 책임은 어떻게 져야(혹은 지게 해야) 하는가.
생각은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착상한 1816년 스위스에서의 여름으로 돌아간다. 메리 셸리는 아직 메리 고드윈이었으며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의 죽음을 겪었다. 같은 해 퍼시 비시 셸리의 아내는 자살했고, 그 죽음이 있고서야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부부는 세 아이를 잃은 뒤에 넷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유일하게 죽지 않고 성인이 되도록 살아남았다. 메리 셸리가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저작 중 열아홉 살에 발표한 첫 작품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불멸의 피조물이 되었다. 1816년의 메리 셸리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이야기였을까. 글을 쓰고 읽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나눈 무서운 이야기가 끝내 장편소설이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태어나자마자 겪은 어머니의 죽음부터 자매의 죽음, 아이의 죽음까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되살리고 싶은 망자들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메리 셸리는 시대와 개인을 넘어서는, 실현 가능한 수단을 쥔 욕망과 책임지지 않는 호기심을 보여준다. 분명 100년 뒤에도 이 작품은 새롭게 읽히고 재발견될 것이다.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박아람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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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중하니 내 삶을 지킬 것이다.
명심해라. 당신은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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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여성 인물들을 낯선 공간으로 이동시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인물들에게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모험심이나 호기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주어진 이동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회색 여인〉의 아나는 투렐의 적극적인 구애에 떠밀리듯 결혼해 그의 성으로 가고, 〈마녀 로이스〉의 외동딸 로이스는 부모를 여의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삼촌을 찾아가며, 〈늙은 보모 이야기〉의 로저먼드 아가씨 역시 부모의 죽음 이후 나이 든 보모의 품에 안겨 친척인 퍼니벌가에 맡겨진다. 신분 유지 혹은 생존을 목적으로 부모를 대리하는 일종의 보호자를 따라(찾아)가는 이 여성들의 이동은 여러모로 제한되어 있다. 특히 앞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끝내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의 사랑이나 이해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질서와 규범에 순응해야 하는 극단적인 통제의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이때 여성 인물들의 정서를 통해 친부모가 존재했던 정겨운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낯설고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대비되지만, 독자는 낯선 세계에서 느끼는 극대화된 긴장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활달하고 즐거웠던 삶 역시 그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보장하지는 않았음을 상기하게 된다. 약혼식을 치르고 결혼식을 앞둔 아나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재고하고 있다는 뜻을 밝히자, 아버지는 “미래의 남편” 외에는 누구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의사는 “상황을 뒤집을 만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이로써 여성 인물을 적대적이거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이동시키며 전개되는 개스켈의 서사는 역설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통제가 보호의 명목으로 지속되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이처럼 사물화된 여성에게 가해지는 통제는 타고난 고유의 매력은 물론, 이들이 가진 지적 호기심이나 상상력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주어진 금기를 깨뜨리거나 통제 밖으로 벗어난 여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축출되거나 비이성적인 공격의 대상이 된다. 〈회색 여인〉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빨리 받아보고 싶었던 아나는 허락되지 않은 성의 일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남편 투렐의 잔인한 범죄를 알아채며 위험에 빠지고, 〈마녀 로이스〉의 로이스는 사촌인 머내시와 젊은 놀런 목사의 일방적 구애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교도라는 사실 때문에 마녀재판의 주인공이 된다. 〈늙은 보모 이야기〉의 모드 양은 “집안의 체면을 손상한 죄”로 대저택에서 쫓겨나 아이와 함께 휘몰아치는 광풍 속으로 내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