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헤르만 헤세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아마 그 전에 《데미안》을 읽었을 것이다. 나는 사춘기 소년이었고, 우울과 불만을 양식으로 삼아 지내던 시절이었다. 세계 안의 자아(의 혼란과 불안정함)를 최초로 인식하는 시기, 말하자면 에밀 싱클레어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문학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책의 은밀하고 안온한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 세상의 너무 환하고 뻔뻔한 빛을 피하려고 했었다. 세상의 빛에 의해 폭로된 나의 누추함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나는 책 속에 칩거의 굴을 팠다. 누추함은 쉬 부정되지 않았고 극복되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굴속에 오래 머물러야 했다. 허겁지겁 책을 읽어야 했다. 그것은 부정이나 극복이 아니라 외면이었다. 참여가 아니라 외면하기 위해 읽은 책들이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제공했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런 식의 의외의 효과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결과적으로 유해하지 않은 부작용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어두운 굴속에서 얻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산다, 사는 것 같다. 상당한 정도의 ‘나’가 그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책들을 읽었다면, 책을 읽지 않고 다른 경험을 했다면 다르게 빚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간, 에밀 싱클레어의 시간은 형성의 시간이니까. 다른 ‘나’에 대한 궁금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이키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나는 《데미안》 같은 책을, 《데미안》을 읽을 때까지 읽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그것은 그 책이 나의 내부를 비춘 최초의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내시경과 같았다. 아니, 나에게 내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목소리였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불량한 아이에게 붙들리고 데미안에게 홀리는 소설 초반의 에밀 싱클레어에게 나는 자발적으로 이입했다. 유년의 기억을 회고하는 이 부분에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에서 하려고 하는 말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썼다. 이후의 전개는 이 눈부신 주제에 대한 변주일 뿐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변주는 반복적으로 주제를 가리키고 주제를 상기시키고 주제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한 개인은 세계 속에 놓인다. 세계 안의 존재다, 인간은. 이 세계는 침투하고 간섭하고 반사하고 굴절하고 회절한다.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의 경향과 정도에 의해 개인의 삶이 만들어진다.이것을 우리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개인은 세계의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에 맞서 싸우며 자기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러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그러려고 한다. 이것이 《데미안》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에밀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혀 노예 상태가 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 유혹이 있다.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프란츠 크로머의 악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어서 에밀 싱클레어를 건들 수 없었다. 한쪽에 모범과 교육, 광채와 투명함과 청결함의 세계가 있고 다른 쪽에 거칠고 무시무시하고 무질서한 세계가 있다. 문제는 이 두 세계가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맞닿아 있는데 금지되어 있다는 데 있다. 금지되어 있는데 유혹적이라는 데 있다. 열기 전까지는 해를 끼치지 않는 폭탄 상자를 생각해보라. 먹지 않으면, 먹지 않을 때까지만 해롭지 않은 최초의 동산의 선악과는 어떤가. 그 상자는 아주 가까이 있고, 좀처럼 눈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탐스럽기도 하다.
에밀 싱클레어가 크로머 앞에서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자발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장면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 그 어리석음에 대한 신랄한 우화다. 그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한 자루 가득 훔쳤다고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크로머의 세계로 스스로 발을 내딛는다. 그는 왜 그러는 것일까. 열기 전까지는 해를 끼치지 않는 폭탄 상자를 엶으로써 그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이 부자유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이 비참함은 역설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이다.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능력, 거짓말할 수 있는 자유가 부자유의 이유가 되었다.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나의 죄였다.”
그는 왜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한 것일까. 하지 않은 선행이 아니라 하지 않은 악행을 뽐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는다. 우리 안의 본성이 그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함을 가장하는 대신 악에 대한 대범함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허영심은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유혹에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지 생각하게 한다. 이 특별한 거짓 자백의 성격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에밀 싱클레어를 끌어당긴 것은 악이 아니라 비범함이었다.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에밀 싱클레어의 시간이다.
이 사실을 폭로하고 계시하는 것은 다른 비범함이다. 선이 아니다. 데미안은 악에 맞서는 선의 화신이 아니라 비범함이다. 데미안은 할리우드 영웅물의 어떤 캐릭터보다 더 극적으로 이 무대, 악에게 조종당하고 농락당하는 에밀 싱클레어의 곤궁 속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웅물의 어떤 캐릭터보다 더 확실하게, 그러나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에밀 싱클레어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 구원자의 힘은 육체적이거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범함, 일종의 정신력 같은 것이다. 이것은, 유혹이 그런 것처럼,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데미안은 이 세계에 속한자가 절대 아니었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았다. 크로머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어쨌든 그 역시 유혹자였다.” 이 구원자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크로머와 마찬가지로, 다른 방식의 유혹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소개된 이 두 캐릭터가 실은 싱클레어, 즉 우리의 내부에 있는 가능성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비범함을 동경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고 저런 존재가 되는 것 같지만, 우리 안에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가, 가능성의 형태로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자극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큰 자극도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의 존재가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에서 수없이 자주,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바꿔가며,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끈질기게 한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 소설의 서두에, 마치 문패처럼 박혀 있는 문장은 문패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 데미안의 방법, 에밀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하고, 자신에게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 이것이었다.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실현하며 사는 것.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 각성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무만이 존재한다고 헤세는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저 생각에 매료되었다. 나의 유일한 과제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 되었다. 나는 이 소설에 빠져든 심리적 요인을 말해버렸다. 그렇다. 나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사람과 조건과 환경들에 의지하거나 순응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된다는 목소리에 넘어갔다. 세상은 복잡했고 싸움터였고 악다구니의 현장이었다. 적은 너무 커서 상대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처지의 열악함과 현실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적의를 내면에의 몰두로 대치하고자 했다. 세상과 싸우지 않고 나와 싸우기로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을 상대하기 버거워 나를 적으로 만든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고유의 운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라고 에밀 싱클레어는 한탄한다. 그것이 어떻게 그만의 한탄이겠는가. ‘나’가 세상보다 상대하기 쉬운 적이라는 생각은 순진하고 어리석다. 그것은 ‘나’를 상대하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게으름 때문에 인간은 쉽게 기존의 금지 조항에 순응한다고 데미안은 말한다.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순화된 것이다. 여기에 붙을 주석은 아마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주어진 이상이나 모범을 찾고 따름으로써 인간은 주어진 세계인 알 속에 안주한다.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몸부림이 힘들어서 순응한다. 그래서 자기가 되는 길, 자기 스스로 사는 삶을 놓친다고 데미안은 말한다. 데미안이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비범함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는 것이고, 이것은 곧 비범해지는 것이다. 비범해진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뒤집는 것이다. 여간해서는 뒤집히지 않는 것이 본성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문장은 이 생각을 관통한다.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깨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온힘을 다해 죽지 않으려 하듯이”(《은둔기계》). 그러는 이유는 깨어남이 폭력이고 파괴이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비범함은 비범하지 않은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힌다. 비범해지라고 유혹하고 비범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도록 괴롭힌다. 이 일이 어떻게 쉽겠는가?
김홍중의 저 문장은 《데미안》의 그 유명한 문장 “새는 몸부림치며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의 부정문이다.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가 몸부림친 기록이 다. 이 기록을 읽는 일은 경이롭지만 편하지 않다. 우리가 걸어온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울로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의 단계마다 그를 돕는 여러 명의 스승이 나타난다.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우리에게도 그런 인물들과 사건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인생의 고비에서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삶이 얼마나 더 엉망이 되었을까. 이만큼이라도 된 것은, 그러니까 나를 깨우고 나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도록도운 스승들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스승들은 누구일까? 인생의 고비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각성하고 이끌어간 이들은 누구였을까? 여럿이지만, 이들을 데미안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데미안이 우리 내부에 있는 타자, 그 무한한 가능성의 얼굴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헤세가 묘사한 데미안의 얼굴을 떠올려보라. 그는 소년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다. 천년을 산 사람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하다.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데미안은 규정되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낯설고 다르고 무한한 존재, 우리 내부에 있는 이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도착하는 일은 마지막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도달하기 위한, 그러니까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몸부림이 있을 뿐이라고 나는 《데미안》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몸부림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도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잠에서 깨지 않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는 걸 나는 데미안에게서 배웠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이노은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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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드디어 나도 한 번쯤 잠시나마 제대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끄집어낸 무언가를 세상에 주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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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우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신중한 사람》, 《모르는 사람들》, 《사랑이 한 일》,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식물들의 사생활》, 《지상의 노래》, 《사랑의 생애》, 《캉탕》, 《이국에서》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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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도입부에서부터 주인공의 ‘운’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년 ‘마놀린’의 부모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노인 ‘산티아고’를 두고 그가 영락없는 ‘살라오’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운이 나쁜 사람, 불행 중 최악의 상태.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운을 갈구한다! 그러나 노인은 팔십오 일째의 행운을 기대하되, 운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운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운이 아니라 ‘운명’을 믿기 때문이다.